우리가 흔히 유태인에 대해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이야기 중에 이런 것들이 있다.
유태인은 슬기롭고 지혜로운 민족이다.
전세계 곳곳에서 사회적으로 매우 성공했으며, 특히 막강한 자금을 바탕으로 미국을 뒤에서 지배하고 움직이는 실질적인 세력이다.
이 말들이 100% 맞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상류층으로 살고 있는 유태인들이 많긴 하지만, 사실 당연하게도 저학력, 저소득, 빈곤층 유태인은 더 많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성공한 유태인들이 많다는 것은 팩트다. 실제로 상당수의 유태인들이 교수, 법조인 등 전문직에서 종사하고 있다. 유태인 미국 유명 대학의 교수 중 유태인의 비율이 약 30%에 달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7-8년 전만 해도 전체 노벨상 수상자 중 유태인이 무려 20%에 달한다는 공식 통계가 있었고, 세계 100대 기업의 소유주 또는 CEO의 약 40%가 유태인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태인들의 성공에 특별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 유태인들이 각 분야에서 성공한 사례를 많이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들만의 독특한 고유의 정신체계와 교육방법의 영향이라는 결론을 내기에 이르렀다.
후츠파와 로쉬 가돌
후츠파(chutzpah, חוצפה)는 히브리어로 무례함, 뻔뻔함, 철면피 같은 뜻을 가진 단어다. 유태인들의 독특한 정신 문화로, 권력자가 권위자에게 과감하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용기의 밑바탕이 된다. 어떤 면에서는 기득권에 대한 도전일 수도 있지만, 좀더 근본적으로 격식과 체면, 지위나 계급의 높고 낮음에 구애받지 않는 당당한 태도로서 용기를 뜻하기도 한다. 후츠파는 자신 역시도 권위나 권력에 의존하여 내 생각을 상대에게 강요하기보다는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냉철하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도록 만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태인들의 교육과 일상생활 전반에는 이 후츠파 정신이 깃들어 있으며, 유태인 성공 사례의 원동력은 바로 이 후츠파에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로쉬 가돌(rosh gadol, גדול ראש)은 히브리어로 '큰 머리', 또는 '큰 지도자'라는 뜻이다.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 그냥 열심히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더 이상 어떻게 뭘 할 것이 없을 정도로 헌신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정신을 말한다. 후츠파 정신과 이 로쉬 가돌 정신이 맞물려 돌아가면서 겉으로 보기에는 조직의 질서나 상하관계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제잘난 듯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매사에 도전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이 있으며, 결국은 이러한 노력에 의해 성공을 일구어내었다고 보는 게 맞는다.
하브루타
결국 크게 성공한 유태인들의 원동력은 후츠파와 로쉬 가돌 정신에 입각한 철저한 자신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노력에 필요한 지혜와 지식을 효과적으로 학습할 수 있게 해 준 것이 바로 하브루타(chavruta, havruta, חַבְרוּתָא)다. 하브루타는 '친구'라는 뜻의 히브리어 '하베르'에서 파생된 단어로, 문자적으로는 우정, 친구, 동료 등을 뜻하지만, 교육방법으로서의 하브루타는 친구, 부모, 교사 등과 서로 짝을 이루어 특정 주제에 대한 질문을 주고받으면서 지식과 지혜를 깨우치는 학습방식을 말한다.
하브루타를 유태인들에게만 있는 독특한 교육방법이라고들 하는데, 내 생각에는 사실 특별한 교육방법이라기보다 그들 일상생활 속에 저변에 넓게 깔려있는 삶의 태도의 일부분이라고 본다.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가 토론을 한다. 직장과 학교에서도 동료들과 짝을 지어 질문하고 토론하고 논쟁하는 것은, 어찌보면 아주 옛날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들이 살던 시절에 만연했던 교육 방법과 비슷한 방법이지 않나 싶다. 다만, 더이상 그런 식의 교육은 오래전 명맥이 끊겼는데, 유독 유태인들 만큼은 아직도 전통적 방식을 고수하고 있고, 그 방식이 탁월한 교육방식이란 점이 연구결과로 나타나면서 주목받게 되는 것 같다.
유대인들의 교육기관인 예시바와 코렐 등에서는 하브루타가 주된 학습법으로 활용되고 있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볼 수 있도록 책상이 배치되어 있다. 마주 앉은 사람과 짝을 이루어 토라 구절에 대해 토론을 하는데, 서로 손을 흔들고 언성을 높여 주장하는 모습이 예사다. 도서관이지만 요란하고 시끄럽다. 하지만 각자가 주제에 대한 자료를 분석하고, 자신의 생각을 조직화하여 상대방에게 설명하며,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질문하면서 지식을 얻는다. 전혀 새로운 관점을 발견하기도 하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도 한다. 학생들은 적극적인 토론 행위로 인해 토론의 내용이 기억에 더 오래 깊이 남는다.
가끔 교회 목사님들 같은 분들이 유태인 노벨상 수상자가 많다라거나 상류층 유태인들을 예로 들며 기독교의 우수성이나 성경공부의 효능 등으로 포장하여 홍보하는 일이 있다. 유태인들이 어릴 때부터 성경을 배웠기 때문에 똑똑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태인들이 모두 똑똑한 것도 아니고 모두 성공한 것도 아니다. 일부 성공한 유태인들이 효과를 본 것도 생활 전반에 깔린 후츠파와 로쉬 가돌 정신문화에 의한 각고의 노력, 그리고 생활화된 하브루타가 도움이 된 것이지, 절대 성경을 배워서 그런 것은 아니다.
하브루타 논쟁의 원칙과 토론의 원리
하브루타는 부모나 교사가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방식이 아니다. 누구라도 같이 대화하고 질문하고 토론하면서 새로운 것을 이해하고 터득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교사도 되고 학생도 되는 형태다. 이런 하브루타에는 논쟁의 원칙과 토론의 원리가 있다.
1. 하브루타 논쟁의 원칙
- 토론할 때 짝끼리 서로 눈을 마주본다.
- 상대방의 말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진지한 자세로 경청한다.
- 자신이 듣고 이해하고 생각한 내용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근거를 제시한다.
- 짝과의 합의점을 찾기보다는 자신의 논리를 체계화하고 상대방의 논리를 반박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 상대방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때에는 왜 동의할 수 없는지에 대한 이유와 근거를 제시한다.
- 서로가 각자 자신의 주장이 가장 좋은 의견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노력한다.
- 서로 어떤 의견이 가장 좋은 것인지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토론을 펼치기는 하지만, 사소한 주장도 논리적 근거를 이해하고 존중한다.
2. 하브루타의 토론의 원리
- 진술(statement): 사실적으로 얘기한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간략하게 언급한다.
- 질문(question): 진술한 사람의 정보를 듣고 상대방이 그것에 대해 날카롭게 질문한다.
- 대답(answer): 진술한 사람이 질문에 대해 답한다.
- 반박(contradiction): 대답에 대해 반박하거나 반대 의견을 제시한다. 날카로운 반박일수록 효과적이다.
- 증거(proof): 처음 말한 사람이 자신의 주장에 대해 논리적으로 증거를 제시하여 증명한다.
- 갈등(difficulty): 다시 증거를 댄 것들에 대해 사실이나 진실이 아닌 것들을 현명하게 찾아내어 지적한다.
- 해결(resolution): 결론을 짓는다. 원래 말한 사람이나 짝이 함께 갈등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찾고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하면서 마무리 짓는다.
하브루타의 교육적 효과
1. 고도의 사고능력 함양
질문과 토론, 논쟁만큼 뇌를 움직이게 하는 것도 없다. 토론과 논쟁을 하기 위해서는 치열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말을 들으면서도 동시에 거기에 반박할 말과 논리를 치열하게 생각해야만 하므로 고도의 사고 능력이 길러질 수밖에 없다. 하브루타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과 사물에 대해 치열하게 생각하도록 만든다.
2. 창의적 사고력 증진
하브루타는 태생적으로 유태교의 경전인 토라와 탈무드를 가장 효율적으로 학습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한 학습 방법이다. 탈무드는 랍비와 현자들의 토론과 논쟁 형식의 글로, 그런 대가들의 견해에 대해서도 질문하게 하고 다른 견해를 가지도록 하는 것이므로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도 뒤집어 생각하게 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다양한 견해나 관점,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한다. 상대방과 다른 나만의 견해를 가져야 토론이 가능하다. 하브루타는 나만의 생각, 새로운 생각, 남과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며, 그런 것을 우리는 창의성이라고 부른다. 창의성이란 다르고 새롭게 생각하는 능력이며, 하브루타가 바로 그 창의성을 가장 잘 계발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3. 자기주도적 학습 능력 함양
자기주도학습은 학생들이 내재적인 동기를 갖고 스스로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하브루타는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하고, 미리 토론에 대해 만반의 준비를 해오지 않으면 수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자기주도 학습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학생들이 스스로 자료를 찾고, 고민하고, 부모에게 물어가며 토론을 준비하기에 유태인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다그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
4. 원만한 의사소통 능력 신장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더라도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지 못하고, 설득하지 못하면 그 아이디어는 실현되기 어렵고 결국 쓸모가 없게 된다. 하브루타는 그 자체가 대화하고 토론하는 것이기 때문에 학생들의 의사소통 능력과 설득력을 길러주고,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태도를 갖게 한다.
5. 실천적 지식의 내재화
전통적 하브루타에서는 토라와 탈무드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으로 대립하면서 치열한 논쟁을 펼치지만, 결국에는 이것을 어떻게 내 삶에 적용할 지를 고민한다. 공중에 붕 뜬 의미없는 논쟁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논쟁하는 것이다. 어떻게 실천할 지 방법을 생각하고, 정리된 생각들을 생활 속에서 실천에 옮긴다. 유태인들은 지식은 반드시 지혜로 합쳐져야 하는 것이라고, 반드시 실생활에 적용하고 응용할 수 있어야 진가를 발휘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신념이 그렇게 유태인 중에서 성공한 인물들이 나올 수 있게 만든 원동력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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